〈나무〉는 인권운동가 박래군 씨의 책 '아!, 대추리'를 읽고 쓴 곡이다. 책에 나오는 ‘나무를 뺏긴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아 가사를 쓰고 곡을 붙였다. 2014년 가을 또는 2015년 봄쯤 썼던 것 같다. 가사는 14년에 써 놓고, 곡은 15년에 붙였을 수도 있다. 사실 책에 어떤 얘기가 있었는지도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곡에는, 이야기와 상상, 경험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곡을 쓴 지 한참 된 지금은 그 셋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대추리의 나무는 내 기억 속에 어떤 나무를 거쳐, 언젠가 본 영상-이미지들 속 나무를 돌아, 다시 대추리로 갔다. 그런 식으로 나와 대추리, 나무를 둘러싼 상상들이 연결되었다.

이 노래는 나 자신의 변화를 알려주는 곡이기도 하다. 부끄럽지만, 이때쯤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대추리 사태로부터 약 10여 년이 흘러서야 나는,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예전과 같았다면,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책을 읽고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전역 후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두 번의 재개발을 만났고 두 번의 이사를 했다. 소장이 날아오고, 플래카드가 걸린다. 집 주변이 헐리고 인적이 끊긴다. 버려진 가전과 깨진 유리가 길을 덮는다. CCTV가 들어서고 머리 짧은 사내들이 늘어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떠나는 것뿐이었고, 떠나는 것으로 문제는 봉합됐다. 어디에도 내 집은 없지만, 어디든 내 집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무처럼 장소에 뿌리내린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장소와 집이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집은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어떤 것이다. 철거는 건물로서의 집, 물리적인 형태로서의 집이 아닌, 세계와 공간의 기준으로서의 집을 제거한다. 그들은 이제 영영 집에 갈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관계 방식의 존재를 모르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람들이 왜 기어이 거기에 머무르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돈 얘기가 나온다. 보상금을 타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라 말한다. 보상금이 부족할 때는 공감하던 사람도 보상금이 늘어나면 관심을 끊는다. '부당함에 싸워줄 수는 있지만, 네 욕심을 위해 싸워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욕심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집은 그곳일 수밖에 없다. 그곳을 미는 것은, 그들이 마음속에서 ‘집’이라는 단어를 미는 것이다. 돈과 '집'을 바꿀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장소에 무심하다. 자주 가는 곳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도 익숙하다. 가끔 생각나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다.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나는 조금 달라졌고, 그래서 이 노래를 쓸 수 있었다. 비단종 씨는 이 노래가 경험담이냐고 물었다. 아니다. 그렇지만 아주 약간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튼, 그렇다.